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슐리외 추기경 (문단 편집) == 일화 == 일반적인 칼과 구별되는 형태의 끝이 뭉툭하고 날이 두꺼운 식사용 나이프를 고안한 것도 바로 리슐리외인데, 어느날 손님이 예리한 나이프의 끝으로 이를 쑤시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원래는 리슐리외의 집에서만 사용되었던 이러한 끝이 둥근 나이프가 퍼진 원인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개 두 가지 설로 좁혀지는데, 첫 번째는 리슐리외 이외에도 나이프로 더러운 짓을 하는 꼴을 견디기 힘들었던 귀족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술에 취한 귀족들이 나이프로 난투극을 벌였을 때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안전상의 이유라는 것이다. ~~귀족하고 사이가 나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유럽]]의 식사자리 안전은 지역과 시대별로 차이는 있지만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유럽]]에는 "7명 이상이 있는 자리에서 식사하는 도중에 발생한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라는 법률도 존재했는데, 서유럽은 지하수의 수질이 나빠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식사 때 물 대신 술을 마시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식사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술에 취하기 일쑤였으며, 그 와중에 시비가 붙어 난투를 벌이는 일이 매우 많은 상황에서 증거와 증언을 찾아 정확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다수가 식사할 경우, 아예 날붙이 자체를 식사자리에 들여놓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리슐리외가 개발한 이러한 나이프는 생각외로 널리 퍼졌고, 마침내 1669년 [[루이 14세]]가 전 [[프랑스]]의 식사용 나이프를 그렇게 만들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다. 야사에는 《[[삼총사]]》에서 대립하던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와 [[불륜]]을 저질렀고, 사실은 [[루이 14세]]의 친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프랑스]]로 시집온 안 도트리슈의 [[고해성사|고해 사제]]이기도 했다. 혹은 그의 후계자 쥘 마자랭 [[추기경]]이 [[루이 14세]]의 친부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쥘 마자랭]]은 안 [[왕비]]와 거의 비슷한 나이로 친분 관계가 깊었다고 한다. 리슐리외가 [[루이 13세]]의 재상으로 일했듯, 안 왕비의 섭정기에는 마자랭이 [[프랑스]]의 재상으로 거의 전권을 쥐었다. 이렇듯 루이 14세의 친부 논란이 끊임없이 오갔지만 루이 14세를 가진 기간, 즉 안 도트리슈의 임신기간으로 추정되는 날은 리슐리외와 쥘 마자랭 모두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가 있었고, 이 기간동안 안 도트리슈와 루이 13세가 3번 동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향수를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머스크향을 광적으로 즐겼다. 속옷까지 마구 뿌려대 그 냄새가 극장 문 밖에서도 났다고 할 정도였으며 향수 속에서 살아가는 프랑스인들조차 진절머리를 쳤다고. 이에 리슐리외는 "리슐리외가 들어서면 코를 막고 가슴을 조여라."라는 에티켓을 전파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자신의 영지이자 낙후된 시골인 [[http://en.wikipedia.org/wiki/Richelieu,_Indre-et-Loire|리슐리외]] 지역에 애착을 가져, 이곳을 발전시키려고 여러모로 많이 노력하고 건물도 많이 세웠다고 한다. 당시 귀족들은 [[추기경]]이자 재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리슐리외 영지에 건물을 세우거나 매입했다고 하나, [[추기경]] 사후에 결국 흐지부지된 걸 보면 영지의 지리적 조건이 영 안 좋았던 듯. 실제로 [[http://en.wikipedia.org/wiki/Richelieu,_Indre-et-Loire#Population|'''1793년에 3,205명'''이었던 리슐리외 지역의 인구가 '''2016년에 1,755명'''으로 감소]]했다.[* 참고로 동양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명나라|명]] 태조 [[홍무제]]였다. 자신의 고향인 봉양을 좀 잘살게 만들겠다고 아예 봉양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봉양은 작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동네였기에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수도도 그냥 [[난징]]으로 남았다가 [[정난의 변]] 이후에는 아예 북쪽인 [[베이징]]으로 옮겨진 건 덤.] 본인은 [[성직자]]로 아내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에 자신의 작위와 재산을 종손자[* 아르망 장 드 비뉴르 (Armand Jean de Vignerot). 누나 프랑수아즈 뒤 플레시 (Françoise du Plessis)의 손자이다. 이후 아르망은 리슐리외 추기경의 작위와 재산들을 물려받은 뒤 자신의 성에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du Plessis de Richelieu)'를 추가했다. 여담으로 아르망의 아들이 루이 15세 시대의 유명한 난봉꾼 (3대)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 드 리슐리외 (Louis François Armand de Vignerot du Plessis de Richelieu)]]이다.]에게 물려주었다.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의 손자인 5대 공작 아르망 에마뉘엘은 [[루이 18세]] 왕정복고 때 두 번 재상을 지냈다. 리슐리외 공작위는 8대 공작이 사망한 1952년에 단절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